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자 :이종각
  • 출판사 :메디치미디어
  • 출판년 :2015-07-13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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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을미사변 120년 만에

드디어 명성황후 시해범의 실체가 드러나다!





을미사변 120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재조명

낭인이 살해범이라는 통설을 뒤엎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군대와 낭인들이 경복궁 담을 넘어 들어가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하고 불태웠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 여러 증언자의 기록과 일본외교 문서 등을 종합할 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1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범인의 정체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은 미우라 고로 주한공사가 총책임자가 되어, 대원군의 쿠데타로 위장하고 낭인부대를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했다는 정도다. 영화와 드라마가 묘사하는 명성황후의 최후에는 언제나 기모노를 입고 칼을 휘두르는 낭인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황후 시해범이 낭인이라는 통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을미사변은 일본 군부의 군사 작전이었고, 그 범인 역시 군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미우라 공사가 왕후 살해 작전에서 철저히 배제시켰던 인물)가 보고한 「우치다 보고서」를 비롯하여, 그가 본국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개인서신, 그 밖에 관련 자료를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패권을 다투던 일본 제국 정부가, 왕비 살해라는 막중한 임무를 깡패와 다름없는 낭인패들에게 맡겼을 리 없다는 것. 곧 을미사변을 바라보는 시각틀 자체를 바꾸어야만 이 사건과 범인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여우사냥’은 일본 군부의 군사 작전이었다!

을미사변은 1년 전 ‘경복궁 기습 점령’ 사건의 복사판




사실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은 을미사변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명성황후 살해 1년 전에 일본군은 ‘경복궁 기습 점령’ 사건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 이 사건은, 일본군 2개 대대가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인질로 잡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권을 세운 일을 말한다. 작전계획서까지 마련됐던 이 사건은 을미사변과 거의 복사판이다.

이후 청일전쟁의 승리로 의기충천했던 일본은 러시아 주도로 이뤄진 삼국간섭으로 다시 위기감에 빠진다. 특히 민 왕후를 중심으로 ‘인아거일引俄拒日(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침)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일본 입장에서는 민 왕후 제거가 시급한 목표로 대두되었다. 을미사변을 두어 달 앞둔 7월 19일 육군 무장 출신 미우라가 일본공사로 파견되고, 대본영의 지시로 공사관 부속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 중좌 밑으로 대위 3명과 하사관 5명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배치한다. 실제 사건 당일 경복궁 난입에 동원된 일본군 장교는 10여 명에 이르고, 동원된 군 병력만 해도 3개 대대나 되었다.

이처럼 을미사변을 군사작전의 시각으로 볼 경우, 일본 군부가 결과를 책임질 수 없는 낭인부대에게 그 임무를 맡겼을 리 만무하다. 곧 민 왕후를 실제로 살해한 자는 특별한 임무를 받고 현장으로 투입된 현역 군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바로 경성수비대 소속의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이다.



‘왕비를 살해한 육군소위’는 누구인가?



저자가 미야모토 소위를 왕후 시해범으로 지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결정적인 단서는 을미사변 당일, 우치다 영사가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한 통의 비밀 서한이다. 사변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담은 이 보고에는,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소위로서……”라는 대목이 나온다. 사변 당일 사건의 과정을 전해들은 우치다가 시해범의 정체를 파악하고, 곧바로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이후 그는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의 검사정 보고에는 ‘육군사관’이란 표현을 써 범인의 정체를 흐리고 있다. 하지만 우치다가 하라 차관에게 읽고 태워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민감한 내용이 담겼다는 점에서, 첫 번째 비밀서한이야말로 그날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 우치다가 거론한 육군소위는 누구인가?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4명의 소위가 있었다. 그중 다케나가 소위는 경복궁 경비를 서고 있었고, 미야모토를 제외한 두 명의 소위는 당일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왕비 살해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는 인물이 미야모토 소위이다.

을미사변 직후, 사건에 참여했던 경성수비대 군 지휘관들이 히로시마 헌병대에 수감돼 조사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군 장교와 낭인의 입을 통해 미야모토 소위가 마키 특무조장과 함께 왕비 살해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그중에는 미야모토가 왕비를 보호하려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총으로 쐈다는 증언도 있었다.(이 책 117~118쪽)





사건 직후 일본 군부의 의심스런 움직임들

그리고 미야모토 소위를 둘러싼 여러 의혹들




이런 증언 등이 사실이라면, 미야모토 소위가 왕비 살해 현장에 있었고, 마키 특무조장이 그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은 이후 일본 정부의 대처이다.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특무조장은 사건 한 달여가 지나서야 뒤늦게 본국으로 소환 명령을 받고, 각각 하급장교, 부사관에 불과한 둘의 귀국 동정이 대본영의 참모차장, 육군성의 차관 등 군 수뇌부에게 세세하게 보고가 된다. 그러고는 불과 3일 만에 서둘러 참고인 조사를 끝낸다. 구스노세 중좌를 비롯한 8명의 장교들이 헌병대 감옥에 수감된 채 조사 받은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의심을 더하는 것은 그 다음부터다. 조사 직후 소집 해제된 미야모토가 1년 9개월 뒤에 타이완 헌병대로 발령이 난 것이다. 당시 타이완은 타이완 민중들의 항일투쟁이 극심했던 곳으로, 일본 병사들이 숱하게 죽어나갔다. 특히 토비 진압의 선봉에 선 헌병대는 가장 위험한 병과였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미야모토는 어째서 이 사지(死地)를 제 발로 찾아간 것일까? 그리고 을미사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구스노세 중좌가 타이완 총독부 과장으로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혹을 제기한다. “미야모토를 보낸 배경에는 일본군 수뇌부의 고도의 계략이 숨겨져 있다. 군 수뇌부는 을미사변 당시 미야모토 소위의 역할을 보고받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일본에서 계속 생활할 경우 을미사변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발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에 더욱 부채질을 하는 것은 타이완에서 교전 중 사망한 미야모토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야스쿠니 신사 충혼사』(정부로부터 제신명부를 받아 영령으로 합사한 자들의 명부)에 그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실수로 보기엔 무척이나 중대한 문제로, 앞서 구스노세 중좌가 미야모토 소위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군 수뇌부와 그의 제신명표 문제를 의논했을지 모른다고 추정한다. “이웃나라 왕비를 살해한 자를 야스쿠니 신사가 다른 전사자와 합사해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으로 모시는 사실이 후일 밝혀질 경우, 국내외적으로 큰 물의를 빚을 가능성을 우려”했을 것이란 의혹이다.





왜 미야모토 소위를 살해 현장에 투입했는가?

마키 특무조장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그럼 왜 미우라 공사와 구스노세 중좌 등 ‘왕비 살해’ 작전의 책임자들은 수비대의 중위(5명)와 소위(4명) 가운데 미야모토 소위를 골라 살해 현장에 투입했을까? 저자는 그들이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적임자를 찾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로 하사관이나 병졸에게 그 같은 중책을 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대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중대장(대위)을 제외한 중위나 소위 등 초급 장교 중에서, 두 번째로 일국의 왕비를 살해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는 만큼 상당한 군대 경험과 인명을 살상한 경험, 즉 실전 경험이 있는 자, 세 번째로 임무를 수행한 후 발설하지 않을 ‘신뢰’할 수 있는 자로 골라야 했을 것이다.”(이 책 123쪽) 실제 미야모토 소위는 10여 년에 걸친 군 경력에다 ‘동학당 정토’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럼 살해 현장에 있던 마키 특무조장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그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주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미야모토 소위 혼자 현장에 투입했을 때, (…) 부상, 살해당해 임무 수행에 실패할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현장 상황이므로, 단수보다는 복수로 보내 상대방의 방어 또는 위해에 대비하는 일반적인 신변 경호의 원칙을 따랐을 것이다. 두 번째로 (…) 미야모토 소위가 혹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처지에 놓일 경우 그 임무를 대신 수행하라는 역할이 부여됐을지 모른다. 그가 하사관 가운데서 가장 경험이 많은 특무조장인 만큼 충분히 그 역할을 해내리라 판단했을 것이다.”(이 책 130쪽)





“이 책은 을미사변 연구의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을미사변 3개월여 만에 사건의 총책임자 미우라 일본공사를 비롯해, 일본인 56명(군인 8명, 민간인 48명) 모두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사이자, 우리 민족의 자존심에 커다란 생채기로 남아 있는 을미사변의 허무한 결말이었다.

이 책은 을미사변 연구의 가장 난제인 ‘명성황후 살해범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일본 군부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다루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범이 민간인 신분의 낭인인 경우와 군인인 경우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당시 주한 일본공사의 지휘를 받아 동원된 일본군 부대에 소속된 군인, 그것도 현역 장교가 시해범일 경우 당시 일본 정부의 법적·외교적 책임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

사건 직후 일본인들의 증거 인멸과 왜곡 등으로 여전히 을미사변 연구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본 학계의 경우, 재일한국인 사학자와 극히 일부의 일본인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의식적으로 이 사건에 대한 연구를 외면하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은 국내 연구자들이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명성황후 서거 120년을 맞은 올해 출간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을미사변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를 돕고, 관련 연구자들에게는 새로운 자극이자 단초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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